지금까지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반박하는 예시를 인간 언어의 보편성에서 찾았다면, 이번에는 귀납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문화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이론을 반박해 보자. 이러한 연구는 노트북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의 연구를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동일한 사고방식이나 문화를 공유하지 않는 민족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는 구소련 연방의 각 공화국에서 사용되지만, 문화는 저마다 많은 차이를 보인다. 사피어-워프의 가설에 따르면 언어의 상대성이 문화의 다양성을 유발하는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류의 역사상 언어는 변하지 않고 문화만 변화한 경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6세기 영국에는 기독교가 들어와 정치 제도를 비롯한 많은 문화의 양식을 변화시켰다. 그런데도 언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노트북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경우는 제외되었다. 영국 역사상 1066년은 중요한 해로 기록된다. 당시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은 잉글랜드 원정에 나서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한다. 앞서 노트북이 예로 든 기독교의 전파가 언어의 변화와는 무관했었다면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은 단순한 프랑스의 한 공국에 의한 잉글랜드 정복이 아니었다. 즉, 언어와 문화가 동시에 잉글랜드에 전파되어 그 후 수백 년간 영국은 프랑스와 같은 라틴 문화권에 편입된다. 그러므로 문화의 전파는 언어의 전파와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지만, 만약 언어가 동시에 전파된다면 문화 종속의 정도는 훨씬 더 심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구상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상당수 있다. 대표적인 나라로는 이란을 들 수 있다. 이란어는 인구어족의 인도-이란어파에 속한 언어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주변의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 있다. 즉, 이란어는 다른 어족에 속하지만 아랍 문자를 사용하고 종교도 이슬람교를 국교로 삼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나라로는 북유럽의 핀란드를 들 수 있다. 핀란드어는 우랄어족에 속하는 동방 계통의 언어이지만, 주변의 스칸디나비아제국의 문화권에 편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핀란드인은 인종과 언어가 주변의 민족과 다르지만 게르만 민족과 같은 문화권에서 사는 것이다. 언어결정론의 강한 가설을 주장한 워프는 상이한 언어 간에는 번역도 어렵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언어 간의 번역은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 물론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워프는 번역의 불가능성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례 연구에 따르면 문화가 원시적이라고 해도 그 언어를 해석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사피어와 워프의 주장을 따르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배운 모국어로 사고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축적하며 문화의 형성에 일조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는 이중 혹은 삼중 언어구사자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모국어처럼 언어를 구사하려면 사춘기 이전에 그 언어를 습득해야 한다는 것이 심리 언어학자들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사춘기 이후에 모국어 이외의 언어를 배운 사람도 하나의 언어가 아닌 여러 언어로 생각하고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피어-워프 가설을 반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언어와 사고와의 관계를 사피어-워프의 가설을 소개하면서 그에 대한 사례 연구도 함께 살펴보았다. 언어와 사고, 나아가서는 문화와의 관계는 분명히 그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고는 뿌리이고 문화는 땅 위의 나무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언어는 처음부터 문화에 영향을 주고 그 형성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새로운 어휘는 그와 상응하는 새로운 문화적 형태의 부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처음에 영향을 준 쪽은 언어가 아니고 문화이다. 그러나 그 후 이 과정은 역전된다. 즉, 새롭게 만들어진 언어가 집단의 사고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언어가 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언어는 문화 학습의 도구이다. 우리는 신석기 시대와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의 실체를 고고학자들의 연구 덕분으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부터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을까? 구석기인들은 원시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을까? 이 문제의 답은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들이 남긴 돌도끼나 돌화살촉 등의 유물을 관찰하면, 그런 연장의 제작은 언어의 도움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단순한 몸짓과 동작만 가지고는 정교한 연장들의 제작을 타인에게 전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연장의 제작 방법을 타인에게 전수하는 데에는 언어가 필수적이었을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그들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그 언어의 수준이 원시적이고 기본적인 체계만 가진 언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가 문화에 미치는 두 번째 영향은 언어가 문화 보존의 도구라는 사실이다. 언어 사용 집단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문화의 형태를 접한다. 그러나 유형 혹은 무형 문화는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문화의 형태를 가장 오래 보존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그 집단이 어떤 문화를 수용하며 살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언어는 문화 계승의 도구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인류 문화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문자라는 매개체가 있었기에 문화의 계승이 가능했을 것이다. 문자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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