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동물과 가장 다른 점은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어란 인간이 사용하는 상징체계 중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입을 통하여 말을 한다. 언어학자들은 언어의 첫 번째 기능이 의사소통에 있다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언어를 구사할 때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생각은 언어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우리 머릿속의 생각은 언어에 의해 형성되는가? 아니면 언어가 생각에 따라 이루어진 뒤에 입을 통해 구사되는 것인가? 일찍이 철학자들은 언어와 사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들이 주로 관심을 가진 문제는 사고와 언어와의 관계이다. 이 문제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생각하는가? 아니면 생각을 통하여 말을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일단의 학자들은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주거나 사고를 결정한다는 가설을 주장했다. 이 글에서 우리는 그들의 가설과 사례 연구들을 살펴볼 것이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는가? 일찍이 18세기 독일의 철학가이자 문인이었던 헤르더는 “한 국가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있고, 그 세계관에 따라 세계를 재편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어와 역사, 언어와 세계 인식,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관계가 이를 뒷받침한다고 부연 설명을 하였다. 언어에는 그 민족의 역사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한국어의 경우, 국어에서 차지하는 한자어의 비중과 몽골어의 흔적만 보아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영어에 차용된 수많은 불어 어휘도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한 역사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단서이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교통 신호등의 초록 불을 파란 불이라고 하고, 초록색의 초원도 파란 초원, 하늘색의 하늘도 파란 하늘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혼용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색맹도 아닌 한국인들은 왜 초록색과 파란색을 구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것일까? 우리는 현실 세계와 사회적 세계를 가정해 볼 필요가 있다. 현실 세계란 그 누구의 눈에도 동일하게 보이는 객관적인 세계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파란색과 초록색이 엄연히 구별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왜 이 두 색깔을 구분하지 않을까? 그 이유는 언어에 있다. 본래 한국어의 기본색은 흰색,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 붉은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어에서 초록색은 파란색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파란색과 초록색을 혼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어떤 세계에서 형성되는가? 만약 언어가 객관적인 현실의 세계에서 형성된다면 위에서 언급한 혼용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언어는 객관적 세계가 아닌 사회적 세계에서 형성된다. 다시 말해 인간 집단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회를 이루고 사느냐에 따라 언어는 각각 그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에스키모어에는 눈과 관련된 어휘가 상당히 많고, 아랍어에는 낙타와 관련된 어휘가 매우 많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를 한국어와 비교해 본다면 언어가 객관적인 현실 세계에서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언어가 사회적 세계에서 형성된다고 본 학자는 미국의 언어학자 사피어이다. 앞으로 우리는 사피어와 그의 제자 워프의 이론에 대해 심도 있게 접근할 것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단어와 문장을 통하여 사고, 나아가서는 철학을 배운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대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말에 의해 표현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사고는 말이 지배하고 있으며, 생각은 소리 없는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와 언어의 종속 관계는 지금까지 언어학이나 심리학 같은 학문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이고,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는 것도 성급한 일이다. 19세기 독일의 언어철학자 훔볼트는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이나 정신 구조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훔볼트가 지적한 언어의 영역은 특히 어휘의 장을 가리키는데, 어휘의 장이란 같은 범주에 묶을 수 있는 어휘들의 총집합을 말한다. 바로 이 어휘의 장이 각 언어 집단마다 차이를 보이는데, 이러한 차이가 구성원들의 정신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배경은 미국의 언어학자 사피어와 그의 제자 워프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정립되었다. 사피어-워프의 가설에 의하면 우리들의 사고 과정이나 경험 양식은 언어에 의존하고 있으며, 언어가 다르면 거기에 대응해서 사고와 경험의 양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피어-워프의 주장은 언어가 사고와 경험 양식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이론을 언어결정론이라고 부른다. 언어결정론이 미국에서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인류학자들이 당면했던 특이한 문제도 한몫했다. 즉, 미국의 인류학자들은 수많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문화적 차이가 언어의 상이함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사피어와 워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언어가 사고와 경험 양식을 결정한다는 이론을 일반화시키기에 이르렀다. 사피어는 언어가 사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약한 가설을 폈던 반면, 워프는 언어가 사고를 결정한다는 강한 가설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객관적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고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서 인식한다는 것이다. 워프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각자의 모국어를 사용하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어는 문화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사피어-워프의 주장에 따르면 언어는 문화의 종속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양식에 영향을 미치거나 문화 양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 대해 찬반양론이 사례별 연구에 의해 검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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