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는 문화는 위에서 소개한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우리는 문화의 정의를 철학에서 빌려오지 않고 인류학에서 빌린다. 문화를 연구 대상으로 삼는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의 정의는 ‘한 집단의 생활 양식’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문화란 사람의 행동 및 사고에서 나타나는 특정한 양식이다. 예를 들어 한국인과 인도인은 주택, 의복, 음식의 종류, 요리 방법, 음식을 먹는 방법, 친족 조직, 신앙, 조상에 대한 태도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이 문화의 차이라고 인류학자들은 설명한다. 이 글에서는 언어와 문화의 만남을 인류학에서 정의한 문화의 개념에 근거해 살펴볼 것이다. 언어학에서는 문화가, 문화인류학에서는 언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두 학문이 언어와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서로 상보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언어학에서 문화가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 자체가 문화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여러 요소 중에서 언어는 인간만이 가진 기호 체계이며 지적 또는 사회적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그 소산을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는 문화의 한 부분인 동시에 문화 자체를 떠받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문화의 소산이라고 한다. 이 말은 언어가 문화의 구성 요소 중의 하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문화의 다른 요소 중에서 언어의 비중은 매우 크다.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는 인류학에서 다루는데, 그중에서도 문화인류학이 그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문화인류학은 문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하는 학문으로 주로 미개 민족의 친족 제도,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종교적 행사, 세계관 등을 조사한다.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문화 인류학자들은 언어가 문화에 종속된 구성 요소라는 입장에서 연구를 시작한다. 그러나 과연 언어와 문화와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문화가 언어에 영향만 미치는 것일까? 이 문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처음에는 다양한 문화 형태가 생겨난 다음에 언어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형성된 언어는 그다음 단계에서 반대로 문화에 영향을 미친다. 이 글에서 언어와 문화의 상관관계는 후자의 입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문화와 개인 간의 관계를 거미와 거미집의 관계에 비유한다. 거미가 개인, 거미집이 문화에 해당한다면 거미가 자기 몸에서 실을 뽑아내 거미집을 만들 듯이 개인은 문화의 창조자인 동시에 문화의 소재지가 된다. 그리고 그 개인은 그 자신이 자아낸 거미집인 문화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는 문화의 수인이 된다. 그러므로 거미가 자신의 거미집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개인도 자신이 살아온 문화적 환경에서 벗어나 살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문화는 개인에게 행동 유형을 마련함으로써 고통스러운 시행착오의 학습을 할 필요가 없게 해준다. 다시 말해 거미가 거미줄의 여러 행로를 따라 이동하듯이, 개인은 이미 만들어진 거미줄처럼 기존의 문화 양식을 답습하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가 관찰하고 측정할 수 있는 사물이나 사건이라기보다 공유된 관념과 의미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문화란 일차적으로 개인들의 정신 속에 있는 공통의 의식적, 무의식적 체계이다. 예를 들어, 의사소통을 위한 언어와 같은 기호 체계는 부락 또는 민족의 문화 체계로서 개인들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여기에서 언어와 문화의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언어가 집단에서 사용되기 위해서는 그 집단이 그 언어 코드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문화도 사회의 구성원들이 후천적으로 습득하는 공동의 코드 체계를 통하여 학습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류학자 화이트는 인간이 상징을 다룰 수 있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되고 이것이 문화의 기초라고 생각했다. 성당에서 성수를 사제가 신자에게 뿌릴 때, 그 물은 여느 물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종교의식에 사용된다는 특별한 상징성 때문에 그 효력을 발하는 것이다. 화이트는 인간이 상징 행위에 기초하여 만든 사물 및 사건들을 상징물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문화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인간이 만든 상징물 중에서도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해 만들어진 가장 보편적인 상징체계다. 그러면 언어 이외의 대표적인 상징체계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문화의 다양한 형태들이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면 의복, 그림, 음식, 건축물 등의 물질 문화는 그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여자들이 치마를 입지만 스코틀랜드의 킬트는 남자들이 입는 치마의 일종이다. 게다가 킬트의 격자무늬와 색깔은 집안마다 다르다고 한다. 마치 중세 서유럽의 왕실이나 귀족의 가문에서 사용하던 문장의 상징성과 같은 이치이다. 유럽 왕실과 귀족의 문장에는 유난히 많은 동물이 등장한다. 이것은 중세 서유럽 사회에서 공유된 상징성이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문장에 들어가는 상징물이 다른 집단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면 기독교 제국이었던 유럽에서 그 상징성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동양에서는 용이 왕과 부를 상징하는 전설의 동물이지만 서양에서는 악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유럽 왕실이나 귀족의 가문에서는 용이 들어간 문장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문장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동물과 식물의 상징성에 대하여 알아보자. 사자는 불굴의 용기를, 독수리는 존귀함을, 표범은 용맹스러운 전사를, 뱀은 지혜를, 물고기는 예수를, 개는 충성심을, 비둘기는 평화를, 붉은 장미는 아름다움을, 흰 장미는 신앙심을 상징한다. 건축물도 상징성을 지닌다고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유럽의 고도를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교회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길 바란다. 교회는 그 도시의 중앙에 위치하고 성주가 거주하던 성채는 높은 언덕에 축조되어 있다. 이는 영적인 세계와 세속 세계를 군림하는 두 수장의 상징성이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사찰은 또 어떤가? 깊은 산 속에 위치한 많은 불교 사찰은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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