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이름은 씨족과 문중에 따라서 각 항렬의 돌림자가 있다. 항렬을 알 수 있는 주민등록증과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 같은 역사책에는 우리 조상들의 이름이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돌림자는 서구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퇴색, 파괴되어 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돌림자는 같은 문중, 같은 혈족임을 표시하는 가장 뚜렷한 언어 상징의 부호로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돌림자는 우리와 그들의 경계선이다. 돌림자는 인류학적으로 굉장한 중요성을 지닌다. 같은 돌림자를 쓴다는 것은 같은 문중, 같은 종중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돌림자는 친족, 혹은 가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는 키워드가 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보면 그에게는 흠 순이라는 남동생과 보의, 문의 두 여동생이 있다. 이들은 같은 아버지,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이다. 김유신, 김 흠 순은 돌림자가 확인되지 않지만 보의, 문의는 분명 ‘흰’를 돌림자로 썼다. 이런 점에서 동시대 고구려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연개소문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각각 남생, 남산, 남 검이라고 했다. 분명 세 아들이 남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 지금도 진위가 문제인 화랑세기에는 신라인들이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남자 형제에만 돌림자를 사용했던 데 반하여 화랑세기에는 여자 형제에게서도 돌림자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김유신은 영모에게서 진 광, 신관, 닥광, 영광으로 이어지는 네 명의 딸을 낳는데 순전히 자매끼리만 ‘광’을 돌림자로 쓰고 있다. 신라인들의 돌림자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 번째 특징은 어머니에 따라 돌림자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20대 풍월주 예원은 정처인 우약공주에게서 아들 오기와 함께 세 명의 딸을 낳는데 온의, 성희, 우회가 그들이다. 자매끼리만 ‘흰’자를 쓴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예원은 성명 미상의 어떤 첩에게서 아들 둘, 딸 넷을 얻는다. 서자는 찰떡, 찰 원이고 서녀는 찰, 촬영, 찬미, 창해다. 첩의 자식끼리는 ‘찰’을 돌림으로 쓰고 있다. 이것은 처첩 간의 구별이 엄격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세 번째로 소개하는 신라인들의 돌림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신라인들이 부모와 자식 간에도 돌림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23대 풍월주 군관 공의 세계에 대해 필사본은 동란이 아버지이며 할아버지는 동종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 증조는 오종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증조부터 순서대로 계보를 정리하면 오종, 동종, 동란이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종, 동을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다. 어머니와 딸도 때로는 돌림자를 썼다. 22대 풍월주 양도 공전에서 보면 양도의 어머니 양명은 목숨 보전의 딸이라고 하고 있다. 어머니와 딸이 ‘명’ 자로 연결되어 있다. 또 김유신의 어머니는 필사본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도 만명이라고 하고 있는데 그 어머니를 필사본은 만호라고 하고 있다. 역시 모녀가 돌림자를 쓰고 있다. 서양인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5대조까지의 이름이 유교 경전에 나오는 경우 해당 한자를 읽지도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조상들이 선조의 이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제는 과연 화랑세기가 후대의 위작이 아니고 신라 시대에 기록된 진본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화랑세기가 20세기 초의 위작이라면 이런 식으로 이름을 만들어 냈을까? 찬란한 고대 문명을 꽃피웠던 이집트인들은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었으며, 이름을 붙이는 것은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특히 파라오의 이름을 신전 등에 새겨 넣을 때는 생명의 고리인 카르투슈에 넣어 음각하였다. 그들은 본명 외에도 비밀 이름을 지었는데, 어머니와 사제가 따로 지어 두었던 이름이었다. 비밀 이름을 지었던 까닭은 아이가 성년이 되었을 때 그의 인품이 그 이름으로 불릴 만하다고 판단되면 비로소 본인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렇듯 이집트인들은 이름을 붙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들은 이름에 정신과 에너지가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명한 파라오 중에서 투탕카멘은 ‘아몬의 살아 있는 상징’, 람세스는 ‘태양의 신 레가 낳은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서양인들이 지금처럼 3요소의 성명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은 로마인들의 영향이었다. 로마인들도 독창적으로 그런 작명법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일찍이 로마가 멸망시켰던 에트루리아인들의 작명법이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세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정 시대부터 로마인들은 이름과 성 뒤에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는데, 그 별명의 유형은 매우 다양하였다. 로마인들의 이름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래 이름은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분증과 같은 것이다. 한국인의 성명은 음양오행 같은 철학적이 뜻이 담겨 있는 까닭에 서양인의 성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직업명이나 거주지 등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 중에는 서양 인명과 공통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성명과 서양의 성명에서 가장 큰 차이를 들자면 우선 한국인의 성명에는 가까운 조상들의 이름에 사용되던 한자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유교 경전 등을 읽을 때 5대까지의 선대 조상들의 이름이 글에 나오면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반면 지금의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 2세의 이름을 보라. 아버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게다가 서양인들의 이름은 무척 길다.
언어학
신라인들의 돌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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